왜냐하면 부동산은 항상 올랐기 때문이다. 왜 1기, 2기 신도시를 지나 3기 신도시가 생기는데 왜 내가 살 집은 없을까? 왜 GTX가 깔리고 광역 버스 노선도 늘어나 교통이 편리해지는데 생활은 더욱 힘들어질까? 왜 AI가 내 삶에 휴식을 주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출근해야만 할까? 왜 한국은 발전했는데 도덕 수준이 높아지지 않을까? 현실은 실망의 연속이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1879)를 소개한다. 헨리 조지는 기술 진보가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의존 관계를 없애지 못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탠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극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 즉 노동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우리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 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자의 힘을 강하게 해줄 뿐이다.
19세기부터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몰랐을 뿐이다. 생산력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대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자유 경쟁 때문이 아니다. 그 경쟁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토지는 일부 계층에 의해 독과점되어 있다. 반면, 토지를 사용하려는 생산자는 경쟁을 한다. 그래서 임금은 최소한으로 내려가고 생산력 증가의 모든 이익은 지대 즉 토지 가치의 상승이라는 형태로 토지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오늘날의 세계를 보라. 각 나라는 정부 형태, 산업 구조, 관세 제도, 통화 제도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계층이 빈곤하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풍요 속에서 빈곤이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는 토지의 독점 현상이 있고, 토지 사용에 대한 대가가 고액의 노동 소득에서 징수되고 있다.
자, 이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똑바로 바라보자. 이 진리는, 생산에 필요한 토지를 장악하면 노동자의 생존에 드는 부분을 제외한 모든 노동 생산을 장악하는 것이 된다. 내가 노동자라면 내가 만들어도 내 것이 아니다.
사업가가 되자. 노동자에겐 생존에 필요한 몫만 돌아온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토지를 가져야 한다. 불편하고 거대한 진실에서 눈을 떼지 말고 생산에 필요한 부동산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내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 사업 소득 등을 이용해 바꿔야 한다. 달라질 건 없다. 하나씩 나의 게임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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